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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롱송 신학교(NHÀ THỜ LÒNG SÔNG)

베트남 이야기

by haijun93 2020. 4. 2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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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손신학교, 이름의 유래

 

 가톨릭 종교시설은 대부분 지명을 따 이름을 짓습니다. ‘롱손’신학교의 '롱송(Lông Sông)‘도 지역명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롱손신학교 근처에는 서울의 한강과 같은 ‘랑송’(Làng Sông)이란 이름의 큰 강이 있습니다. 신학교 이름이 ‘랑송’이 아닌 ‘롱송’인 이유는 지명을 소리나는대로 알파벳으로 표기하면서 랑(Làng)을 롱(Lông)으로 잘못 표기한 탓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름에 관한 표기오류에 지적이 많은 탓인지 최근에는 영어표기를  'Lang Song Seminary'(랑송신학교)로 고쳐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랑송강은 현재 하탄강(Sông Hà Thanh)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탄강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퀴논시의 서쪽 산맥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의 바다를 이어주는 거대한 강입니다. 또한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삼각주 형태의 비옥한 퇴적지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류사의 모든 문명이 거대한 강줄기에 의지해 탄생하였듯, 풍부한 수산자원과 비옥한 토지를 제공하는 하탄강은 퀴논시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참파운명과 떠이선 왕조의 탯줄 역할을 하였습니다.

 

#롱손신학교 연역과 주요특징

 

 오늘날의 롱손신학교 건물은 1618년 이곳에서 신학교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던 3명의 가톨릭 성직자들(프란시스코 드 피나Francisco de Pina, 크리스토 포로 보리Christoforo Borri, 프란체스코 부조미Francesco Buzomi)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864년에 지어졌습니다 건물은 2,000의 대지 위에 숙소, 예배당 및 다목적실 등이 중세유럽 고딕양식으로 지어져있습니다. 특히 수백년 된 고목들이 정원을 꾸미고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갖고 있습니다.

 

 롱손신학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곳은 현대 베트남어문자의 꾸옥응으》의 창제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곳입니다. 한글이 집현전이란 공간에서 세종대왕과 여러 학자들에 의해 창제되었듯, 롱손신학교가 베트남어 연구와 문자창제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 베트남 문자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드 피나(Francisco de Pina, 1585-1625)

 

 프란시스코 드 피나 신부는 포르투칼 가톨릭교회 소속으로 1617년 베트남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자에 기반한 현대 베트남어의 표기체계인 꾸옥응으(Quốc Ngữ, 國語) 표기법을 최초로 창안한 것입니다. 하여 그는 베트남 문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화의 달성을 위해 먼저 현지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베트남어 발음을 포르투칼어 발음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는 방법을 창안하고 문법을 연구하는 한편, 그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에게 전수하여 오늘날의 로마자표기법과 문법을 체계화시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프란시스코 데 피나 신부는 베트남어를 유창하게 하는 최초의 선교사이자, 베트남어로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는 최초의 신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베트남어를 배우려 하는 않는 다른 선교사들을 게으름으로 복음화의 사명을 저버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하노이에서 퀴논시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을 펼치다, 1625 12 15일 다낭 앞바다에서 침몰하던 배에서 승객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베트남 문자의 집대성, 알렉상드로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프란시스코 데 피나 신부가 주장한 '현지어를 통한 복음화의 중요성'에 공감하던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는 선교사들을 위한 베트남어 교육기관을 설립키로 마음먹고 그의 동료인 크리스토 포로 보리(Cristophoro Borri, 1583-1632)와 프란체스코 부조미(Francesco Buzomi, 1576-1639)와 의기투합하여 1618년 퀴논시로 향합니다.  퀴논시 정부는 그들을 환대하고 지금의 롱선신학교 인근에 숙소를 마련해주고 교육기관 설립을 지원합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롱선신학교가 위치한 곳에 로마가톨릭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위한 베트남어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한편 도서편찬을 위해 인쇄소도 설치합니다. 훗날 이곳은 롱선인쇄소 또는 퀴논인쇄소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그당시 베트남에서 하노이와 호치민에 이어 개설된 3번째 인쇄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언어교육뿐 아니라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경제, 천문학, 항해술 등 다양한 분야의 학술연구와 저술활동을 펼칩니다. 이 자료들은 현대 베트남어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지금까지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알렉상드로 드 로드 신부는 1618년 1620년까지 이곳에서 활동 후 1620년부터는 하노이의 베트남 왕궁에서 일하면서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프란시스코 데 피나 신부의 가르침을 받아 이를 집대성하여 1651 '포르투칼어-라틴어-베트남어 사전'을 편찬합니다. 이러한 저술 활동은 이후 베트남의 정식표기체계인 꾸옥응으(國語)의 정립과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합니다.

 

 

# 베트남을 널리 서양에 알린, 크리스토 포로 보리(Cristophoro Borri, 1583-1632)

 

한편, 크리스토 포로 보리 신부는 퀴논시에 머무는 동안 퀴논시의 4명의 학생들과 함께 베트남어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수학과 항해술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한편, 베트남에 대한 다양한 저작을 남겨 서양에 베트남을 알리는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저서 가장 유명한 것은 <Views of Seventeenth-Century Vietnam>(17세기 베트남 풍경)이다. 이책은 베트남을 서양에 자세히 소개하는 최초의 영문서적이다.

 

# 퀴논을 사랑하고 베트남을 찬미한, 프란체스코 부조미(Francesco Buzomi, 1576-1639)

 

또한 프란체스코 부조미 신부는 1618년부터 약 20여년간 퀴논시에 거주하며 베트남에 관한 다양한 글을 남깁니다. 특히 그의 글은 베트남 학자들로부처 호평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빈딘성을 중심으로한 지역언어, 향토문화와 역사 등에 관한 연구자료를 초기베트남어로 집필하여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20년동안 빈딘성 퀴논시에 체류한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글로 베트남을 서양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달리 베트남은 문명 국가이며, 문화적 수준이 높고, 그들이 이룩한 전통문화와 학문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언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베트남의 문자는 한자가 공식문자입니다. 이는 우리가 라틴어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보통 종이 위에 붓과 먹으로 글을 쓰는데, 글 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문자를 배우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자를 읽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베트남의 한자는 중국의 한자와 비슷하지만 읽는법(독음)이 다릅니다. 베트남어의 소리는 마치 피아노의 선율과 같아 중국어보다 조용하지만 풍부함이 있습니다."

 

 

롱손신학교를 방문하면, 

현대 베트남어의 표기문자인 꾸옥응으》의 원형에 관한 자료와 창제관련 자료들 그리고 그 역사적 과정을 함께한 가톨릭 성직자들에 관한 기록과 저서들, 그리고 롱손인쇄소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게 만들었던 그당시 인쇄기계 등 문화유물들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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