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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의 교류역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베트남 이야기

by haijun93 2022. 11. 2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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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최귀묵(2010). 베트남 문학의 이해.서울:창비
최귀묵(2017). 문학의 창으로 본 베트남.서울: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김석회(2013). 한월사신창화시문.서울:글로벌콘텐츠
송정남(2018). 베트남 역사탐구.서울: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천년의 인연

우리나라와 베트남 정부와의 공식 외교(1955 베트남공화국과의 수교, 1992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과의 수교) 앞서 양국의 교류는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 외교사절단은 베이징에서 유학 대결을 벌였고, 베트남 왕자가 우리나라에 망명해 지금도 후손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북쪽과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역사의 끈을 맺어왔다. 나라 역사는 너무나 흡사하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때론 적대적이고, 때론 조공·책봉의 화해관계를 맺어온 것도 같다.

한국과 베트남은 유교를 공유해 왔다. 유교는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를 맺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기록상 가장 먼저 베트남과 한국 역사가 만나는 시기는 고려말이었다. 베트남과 고려는 몽골과 기나긴 항전을 벌였다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나라 모두 지쳤다. 쿠빌라이(원나라 세조) 베트남을 공격할 무렵, 고려는 몽골과 화친을 청했고, 이어 베트남도 몽골에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라는 원나라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북경에서 만난 고려와 대월국의 사신들

1308 베트남(대월) 고려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만났다. 당시 베트남에서 최고의 유학자 (莫挺之) 연경에 도착했다. 때마침 고려 사절단도 연경에 머물렀다. 사절단은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필담이 가능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사신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조선초기 유학자 서거정(徐居正) 사신으로 명나라에 안남국 사신을 만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성종실록』 19 12 24일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서거정이 사은사(師恩使)로 부경(赴京)하여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베트남)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는 제과 장원(壯元)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한 율을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하였는데,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篇)을 지어 수응하므로,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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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대문호 이수광을 아는가?

1597(선조 30)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 북경에 이수광(睟光) 베트남 왕조에서 (馮克寬) 만났다. 사람은 숙소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사절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에게 황제에게 바치는 시집(萬壽慶賀詩集) 서문도 주었다.

고국에 돌아간 꽌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고려말에 베트남과의 유핵 대결에서 고려가 졌지만,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베트남에 수준 높은 유학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얼마나 인기있었는지를 추측할 있는 에피소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인조 6(1628) 12 26일자)

그(이수광)가 중국에 사신갔을 때, 안남(安南, 베트남), 유구(琉球, 독립국 오키나와의 국명), 섬라(暹羅, 태국)의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 보고 그 시를 자기들 나라에 유포시키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가 상선을 따라 교지(交趾, 북베트남)에 갔었는데, 교지인이 그의 시를 내 보이면서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芝峰은 이수광의 호)이란 이를 아는가?"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존중을 받았다.

 

사연인즉,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진주 출신 유생이 정유재란 일본 사쓰마(가고시마) 포로로 잡혀갔다가 교토 상인에게 팔려간다. 그는 교토 상인을 따라 필리핀, 베트남 등지를 따라 다니다가 베트남 고관이 초대한 연회에 참석한다. 베트남 고관은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책을 하나 꺼내면서 책은 당신네 나라 이지봉(이수광) 시인데, 당신은 알겠지요라고 묻는다. 조완벽은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 누구인지 모른다 대답하자 베트남 고관이 서운해 하며 책자를 보여줬다. 조완벽이 책을 보니, 첫머리에 이수광의 시가 실려 있었다. 베트남 고관은 좋은 구절에 비점(批點, 붉은 표시) 찍어 두었는데, 대목의 하나는 이렇다.

山出異形饒象骨 (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 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 (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

 

베트남 고관은 또다른 책을 꺼내면서 책은 귀국 이지봉이 책인데,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다.” 말했다. 조완벽은 베트남 유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이수광의 시를 외우고 있더라고 전한다.

그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10년만에 돌아와 이런 사실을 전했다. 조완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트남에는 읽기를 숭상하여 이곳저곳에 학당이 있어 아이들이 고전을 외우고 시문도 익혔다고 한다

이밖에도 조선 성종 사신으로 조신(曺伸) 연경에서 베트남 사신 (Le Thi Cu, 黎時擧) 시를 주고 받은 일이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 수록돼 있다.

 

베트남의 대학자 꾸이 돈과 조선 홍계희

또한 베트남 대학자 꾸이 (Le Quy Don 黎貴惇) 유명하다. 그는 1760~1762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 사신 홍계희를 만나 주고받았다는 기록이 베트남에 남아있다.

 

瀛海東南各一方 넓은 바다 동쪽 남쪽의 각각 한 지방으로
齊趨象闕拜天王 함께 천자의 대궐에 와 천왕을 배알하도다.
傘圓概似松山秀 우리의 산원산(傘圓山)은 그대 나라의 송산(松山)처럼 빼나고
鴨綠應同珥水長 그대 나라 압록강은 우리 이수(水)처럼 길도다.
六籍以來多學問 육적(籍)이 전래된 이래로 학문이 많고
九疇而後更文章 홍범구주(洪範九) 이후에 문장이 새롭도다.
旅懷習疊如君扇 나그네 회포가 주신 쥘 부채처럼 첩첩하니
新對春風爲展揚 새로 춘풍을 대하여 활짝 펼쳐 보리라.

 - 베트남의 대학자 꾸이 (Lê Quý Đôn / 黎貴惇, 1726~1784) 

   조선의 문신 홍계희(洪啓禧, 1703~1771)에게 보낸  

 

고려 고종 때인 1226 한반도에 귀화한 베트남 (Ly) 왕조의 후손, 화산 이씨花山 李氏)

화산이씨의 시조는 이상용이며 그는 베트남 (Ly, ) 왕조의 6대왕의 둘째 왕자였다. 1225 왕조가 쩐투도(Trần Thủ Độ) 의해 왕위가 찬탈되고 멸족의 위기에 처하자 배를 타고 고려의 황해도에 도달한다. 고려왕실은 그들의 사정을 듣고 위로하여 황해도 창진도에 정착토록하였다. 고려 고종 황해도 지역에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화산군으로 봉작을 받고 한국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주한 베트남관광청 대사인 쓰엉 (Ông Lý Xương Căn/한국명 이창근) 베트남 왕조의 후손이자 화산이씨로서 2010 베트남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복수국적(한국과 베트남) 인정받았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일깨운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베트남어: Việt Nam Vong Quốc Sử)

월남망국사에는 프랑스가 보호국이라는 명목 하에 월남을 착취했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담긴 책이다. 1906년에는 조선말기의 학자인 현채(⽞采), 1907년에는 주시경(周時經) 이상익(李相益) 월남망국사를 번역해서 출판했다. 당시 책은 일본의 국권침탈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충격과 자극을 주어 국권 회복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양국의 독립운동세력은 중국에서 함께 만나 교류하며 상대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더불어 베트남 하노이에 정착한 조선인이 인삼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수입한 최초의 베트남 상품, 안남미 

대한제국시기에는 일제의 수탈과 가뭄으로 식량난이 심화되자, 베트남으로부터 안남미를 수입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수입한 최초의 베트남 상품이다. 

 

프랑스군과 싸우는 호치민의 베트민군의 활동을 지원한, 이문용 

일본군에 징발되어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전선에서 근무하였던 조선인출신의 일본장교 이용문(李龍文, 1916-1953) 일본이 패망하여 1945 9 철군할 다량의 무기를 호치민이 주도하는 베트민군에 인계하여 일본의 빈자리를 노려 베트남을 다시 침력한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는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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