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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 왕조(1778년부터 1802년까지)

베트남 이야기

by haijun93 2022. 11. 2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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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 왕조

(1778년부터 1802년까지)

참고자료
송정남(2018). 베트남 역사탐구.서울: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유인선(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서울:이산떠이선 왕

 

떠이선 왕조의 성립배경

떠이선(西山)왕조(1778~1802) 베트남 역사에서 농민봉기로 세워진 최초의 왕조이다. “부자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라는 구호로 시작된 항쟁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베트남을 양분하여 위세를 떨치던 () 가문과 응우옌() 가문을 차례대로 무너트리며 250년동안 지속된 내전에 마침표를 찍는다. 또한 베트남의 혼란한 정세를 노려 침략한 태국과 중국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게 되면서 농민항쟁을 기반으로한 새로운 왕조, 떠이선 왕조가 수립된다.   

때는 18세기말. 베트남의 () 왕조는 왕위계승 다툼으로 왕권이 힘을 잃자 유력가문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이 북과 남을 각각 독립적으로 통치하며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린다. 이에 전쟁에 동원되는 군역과 막대한 전쟁비용을 위한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해 졌다.

 

농민출신의 응우옌 삼형제 

베트남 빈딘성의 떠이선 지역에 농민출신의 응우옌 형제(응우옌 . , 응우옌 , 응우옌 후에) 있었다. 이들을 떠이선 삼형제라 불렀다. 이들 형제의 조상은 원래 베트남 북부지역의 응에안(乂安) 출신으로, 원래의 성씨는 ()씨였다. 그들의 선조는 남부의 지배자 응우옌()씨의 군대가 찐씨의 북쪽을 공격했을 포로로 잡혀와 뀌논시의 미개척지였던 떠이선에 정착하게 되었고, 성씨도 ()에서 응우옌()으로 바꾸게 된다.  

() 가문과 응우옌() 가문의 내전이 세기 넘도록 지속되는 상황에서 지역관리와  귀족들이 농민의 땅을 빼앗고 수탈하여 대다수의 농민들이 소작농이나 노비로 전락했다.  

다음은 1751 어느 지역관리가 상급기관에 현지 사정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백성들의 곤궁이 극도에 달했음을 굽어살펴 주소서. 만일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속하여 무관심하게 저대로 둔다면, 한 지방이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촌락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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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 삼형제의 봉기

베트남 중부지역은 대부분이 산악지역이라 농지가 부족한 탓에 식량난과 생활여건이 북부지역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못하였다. 이에 1771 떠이선 삼형제는 부자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력을 규합하여 농민봉기를 일으킨다. 이들은 인근마을을 하나씩 급습하여 귀족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없는 자들에게 배분하여 주고 호적과 토지대장 등을 불사르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석방시켰다. 봉기 초기에는 농민, 특히 소작민들과 농노들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확대되어 산지소수민족, 승려, 도시상인, 하급관리, 학자 외국 정착민들까지 가세하며 급속히 세를 확대시켜 나갔다. 

1773년에는 퀴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어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된 응우옌씨 가문의 군대를 격파하며 승승장구 한다. 

남쪽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북쪽의 찐씨 가문은 떠이선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가문 간의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응우옌씨 가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력을 감행한다. 이에 따라 1775 응우옌씨는 북쪽방향의 쩐시 군대와 남쪽 방향의 농민봉기군에게 포위되어 결국 궤멸된다.

쩐씨 가문의 군대가 떠이선 농민군 마저 제압하려하자, 떠이선 농민군은 거짓으로 항복 빈딘성으로 철수한 응우옌씨 가문이 다스리던 베트남 중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한다

한편 찐씨 가문은 응우옌 가문을 멸족시킨 라이벌이 없어지자 왕조의 황궁으로 진군하여 허수아비 황제를 세워 권력을 장악한다.  

응우옌씨 가문의 잔당들이 태국의 4 군대와 함께 떠이선 군을 공격해 왔지만, 이를 격전 끝에 물리치고 베트남의 남부지역을 완전히 평정한다.

 

떠이선 농민군의 북진

이제 떠이선 지휘부는 왕조와 쩐씨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북쪽지역으로 관심을 돌린다. 쩐씨가문이 통치하는 북부지역에서 1773 이래 거의 매년 흉년이 들어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농민들이 아사하는 상황이 거듭되었다. 1778년부터는 궁핍한 생활을 못이긴 농민들의 크고 작은 반란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떠이선 군은 복려멸정(復黎滅鄭)  구호를 내세웠다. 쩐씨 가문이 군권을 장악하고 왕조를 마음대로 조정하며 부정부패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황실을 보전하되, 찐씨를 멸한다 구호아래 1786 6 북진을 추진한다.

북진을 개시한지 1달만인 1786 7 왕조의 수도이자 찐씨 가문의 근거지인 (하노이) 점령하고 찐씨 가문을 멸한 끝에 베트남을 250년간 양분해 통치하면 내전을 일삼던  응우옌과 찐씨 세력을 모두 물리치고 베트남 전국토의 통일을 이룩한다.

 

청나라 20 대군을 물리친 떠이선 왕조의 태조 꽝쭝 황제

마지막 남은 것은 명맥만 남은 황실이었다. 떠이선은 황실의 보호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당장 몰아낼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황실이 명분을 만들어 줬다.

황실의 입장에서 보면, 남부 출신의 농민병들을 믿을 없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황제 찌에우 (昭統帝) 궁궐을 탈출해 중국으로 도망쳤다. 황제는 청나라에 반란군을 응징하는 명분으로 출병을 요구했고, 청나라는 황제의 요청으로 20 명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떠이선 농민군에게는 이상 황실을 보호할 명분이 사라졌다. 1788 11 웅우옌 후에는 황제로 즉위하고 꽝쭝(光中)이라는 연호를 채택했다. 또한 오늘날의 퀴논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베트남인들 사이에 그는 꽝쭝 황제로 알려져 있다.

청의 대군이 베트남 북부지역을 침략하여 왕조의 수도 롱을 점령했다. 

 

이에 꽝쭝 황제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선포하고 청나라 대군을 맞서 출정한다. 

중국인은 우리와 다른 인종으로 그들의 생각은 우리와 같지 않다. 한(漢) 이래 저들은 수도 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는가? 우리는 누구도 이런 수모를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한대에는 쯩씨 자매가 있었고, 송대에는 딘 띠엔 호앙과 레 다이 하인이 있었다. 원대에는 쩐 흥 다오가, 명대에는 현 왕조의 개창자인 레 타이 또가 있지 않았는가. 

※쯩씨 자매(徵姉妹) : 한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목표로 남비엣의 반란을 주도
※딘 띠엔 호앙 : 송나라 원정군을 격퇴한 딘 왕조의 황제
※레 다이 하인 : 몽골군의 세 차례 침략 중 두 번을 격퇴시킴

이제 청이 또다시 쳐들어와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어째서 저들은 ··명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른단 말인가? 장졸들은 분별력과 능력이 있으므로 나를 도와 중대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꽝쭝 황제가 이끄는 떠이선 군은 1789 음력 1 5 밤에 청의 원정군을 (하노이) 인근의 동다지역에서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둔다. 꽝쭝 황제의 청군 격파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의 하나로 손꼽는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꽝쭝 황제의 동다 전투 승전을 기념하여  매년 동다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꽝쭝 황제는 많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한편 지역마다 학교를 건립하여 교육을 장려하였다. 또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세금을 감면해주는 한편, 부족한 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해상무역을 장려하여 유럽과의 무역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연유로 그의 통치기간 중에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상당히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였다. 

꽝쭝 황제의 업적 하나는 한자 대신 쯔놈(베트남식 한자표기) 공식 문자로 지정하여 황제의 칙령, 상거래 문서, 중요의식의 제문 등을 모두 쯔놈으로 작성토록 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이시기에 쯔놈으로 작성된 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꽝쭝 황제는 즉위 4년만인 1792 나이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너무 젊은 나이에 영웅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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