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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고대무역의 중심지, 꾸이년(Quy Nhơn)

베트남 이야기

by haijun93 2022. 11. 19.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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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고대 무역의 중심지, 꾸이년

982년부터 19세기까지

참파 왕국 - 응우옌 군주 통치기 - 떠이선 왕조 - 응우옌 왕조

 

참고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20). 베트남 중부의 고대 무역항. 전남: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송정남(2018). 베트남 역사탐구. 서울: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유지선(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서울:이산

 

참파 왕국의 새로운 수도, 비자야

참파 왕국은 10세기말까지 경쟁관계에 있던 베트남 북부지역의 남비엣(비엣족에 세운 왕조)을 압도하였지만 차츰 남비엣에 밀려나 남쪽으로 여러 번 수도를 옮겼다. 오늘날의 빈딘성 꾸이년시가 참파 왕국의 수도가 된 시기는 서기 982년이며, 1471년까지 참파 왕국의 중흥기를 이끈다.

베트남의 주도권이 참파 왕국에서 남비엣으로 넘어간 시점은 10세기말쯤이다. 참파군은 1,000척이 넘는 전선을 이끌고, 남비엣을 침략하지만, 강한 태풍을 만나 큰 병력 손실을 입는다. 이후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다 오히려 남비엣의 레 다이 하인(Lê Đại Hành) 황제가 이끄는 강력한 반격에 힘없이 무너진다. 남비엣은 기세를 잡아 참파 왕국의 수도인 인드라푸라(오늘날의 다낭시)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참파 왕국은 오랜 수도였던 인드라푸라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비자야(오늘날의 꾸이년)에 수도를 세웠다.  

 

해상무역의 요충지, 비자야

비자야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도 및 페르시아만을 서로 이어주는 해상무역의 요충지였다. 특히 중국과 남해 사이를 왕래하는 모든 선박이 반드시 경유해야 했기에 남해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또한 비자야는 해발 1,000m의 산맥에서 발원하여 유량이 많고 여러 지류로 나뉘어 티나이 만으로 흘러가는 꼰강과 하 타인(Hà Thanh) 강을 보유하여 티나이 무역항으로 들어온 배들이 싣고 온 무역상품들을 수상교통로를 통해 내륙지역으로 비교적 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이는 고대무역항의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특히 티나이 무역항은 비옥한 평야와 인접해있고, 선박이 오가기 편리하고 항구 지역의 수심이 깊어 대형선박들도 쉽게 들어올 수 있어 비자야가 참파 왕국의 중흥기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티나이 무역항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상품 교류가 원활하기 위해서 주변 각 지역의 각종 상품들이 강의 지류를 따라 소형 선박 혹은 산길을 따라 우마차에 운송되어 주요 항구로 집결되어야 하고, 이 주요 항구를 돕는 여러 항구들과 소항구, 위성항구가 반드시 존재해야 했으며 무역상품들은 티나이항으로 집결된 후 외국 상선에 팔려나갔다.

실제로 이런 기능을 담당하는 항구들은 일찍부터 참파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개발되었다. 그 중에 티나이항이 바다를 오가는 선박들의 확실한 정박지로 인정받아 가장 발전했다. 이곳의 참파주민은 인구가 매우 많았고 농업에 기초해서 수산물을 개발하며 식수와 산물을 교역했다. 비자야왕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한 이 조건에 근거하여 수도를 발전시켰다.

 

비자야의 중심 무역항, 티나이항

국제 해양무역로에 위치하여 기원후 초기부터 티나이항의 위상은 여러 역사책에 기록되었고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티나이항은 ‘슈리비자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 역사서에는 띠니(Tỳ Ni) 혹은 티리비나이(Thi LịBì Nại)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크리-보니(Cri-Boney)의 발음에서 기인했다. 『대월사기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1303년 띠니는 점성국의 항구로 상선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곳은 상인들이 모여 매우 복잡한 핵심 항구이다.

『제번지(諸蕃志)』에서는 중국인들이 점성의 수도 비자야를 떤쩌우(Tân Châu)라 불렀고 『경세대전사록(經世大典史錄)』에는 티나이항의 위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북쪽에서 항구로 들어가는 입구는 떤쩌우 하구이며 그 근처에 5개의 소항구가 그 나라의 떤쩌우와 연결되어 있고 동남쪽엔 산이, 서쪽엔 나무로 쌓은 성곽이 있다.

쟈담(Giả Đam)의 「광주통해지도」와 이후 『신당서지리지』는 중국의 광주에서 아랍의 바그다드로 가는 해상로에 국제무역선이 항상 들리는 참파 왕국의 항구 찌엠벗라오, 랑썬, 몬독, 꼬닷국, 본다랑주, 꾸언돗롱산을 추가했다. 몬독이 바로 티나이항의 다른 이름이다.

1335년에 편찬된 레딱(Lê Tắc)의 『안남지략(安南志略)』에서 수도 비자야의 티나이항의 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점성국은 해안에 나라를 세웠고 여러 나라를 항해하는 중국 상선이 연료와 식수를 얻기 위해 항구에 모이는데 이는 남쪽에서 제일 큰 항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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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야성, 티나이성 그리고 타인짜성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비자야 시대는 매우 번영하였다. 인구는 나날이 증가하였고 수많은 큰 규모의 사원과 참파탑 그리고 주로 해안지역을 방어하는 성루가 계속해서 세워졌다. 또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3개의 성 체계가 있었다. 첫 번째로 비자야의 성이다. 두 번째로 비자야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티나이성이다. 해로를 통해 수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티나이성을 통과해야 했는데 참파 왕국의 교통은 주로 수로였기 때문에 티나이성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 번째로 타인짜성은 비자야성의 남쪽에 위치하였고 군대가 주둔하여 훈련하는 곳으로 티나이 만에서 통하는 해로와 남쪽 꾸몽(Cù Mông) 고개에서 오는 육로를 지키는 남쪽의 관문이었다.

바다를 중시하고 항구를 개발하며 국제무역 관계를 확대하는 정책 아래에서 티나이 항은 수도 비자야의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제일 중요한 관문이 되었고 참파의 주요 항구가 되어 수많은 외국 상선을 맞았다.

비자야의 주요 교역품

참파인들은 단순 중계무역에 그치지 않고 비자야의 지역 특산물들을 적극 발굴하고 개발하여 외국상인들에게 수출하였다. 비지야 지역은 백단향, 기남, 금, 쌀, 제비집, 수공예품 등 특산품이 풍부하였다. 특히 기남과 백단향은 외국상인들이 제일 많이 찾는 품목이었다. 제비집은 프엉마이 반도지역의 옌(Yến)섬에서 많이 나 중국 상선에 대량으로 판매되었다. 

티나이항의 유통의 발전에서 꼰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꼰강을 따라 참파의 경제, 정치 중심지와 즈엉롱(Dương Long) 탑, 까인띠엔(Cánh Tiên) 탑, 바인잇(Bánh Ít) 탑, 빈럼(Bình Lâm) 탑과 같은 옛 탑과 사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꼰강은 비자야의 지역생산품을 해외 수출을 위해 항구로 운반하는 교통로이자 해외로부터의 수입품을 내륙으로 운반하는 교통로였다. 

참파인의 시장과 항구는 꼰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산간지역의 소수민족들이 생산한 임산물과 수공예품들이 꼰강을 따라 시장과 항구로 모여들었다. 산간지역 사람들은 비자야 왕국의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성원으로 그들은 코끼리, 코뿔소, 독수리를 사냥하고 육두구, 밀납, 유약, 고급목재, 기남, 백단향 등 임산물을 구해왔다. 그들은 또한 수공예품의 공급원이었는데 토껌쭈옌(thổ cẩm truyền)과 철로 만든 도구 등이 유명하였다. 

 

산 지역 사람들은 이 상품을 모아 참파 선이 직접 가져온 해안의 소금, 해산물, 건어물과 바꾸었고 이 참파 선들은 꼰강을 따라 내려와 꼰강 변의 여러 항구와 시장에 상품을 가져와 외국상인들에게 물건을 팔거나 티나이항으로 직접 가져가 큰 배들에게 팔았다.

특히 꼰강 변에서 13세기부터 참파인들은 도자기 가마를 만들어 이곳에서 수출품이며 품질이 아주 좋은 도자기를 생산했다.  도자기는 꼰강을 따라옮겨져 지역의 여러 시장에서 팔리거나 티나이항으로 운송되어 외국 상선이나 참파인들이 각 지역으로 옮기는 대형선박들에 실려갔다. 많은 종류의 도자기가 하라(Hà Ra) 하구 난파선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필리핀의 판다난섬 근처의 15세기 난파선에서 다량의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일부 도자기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서부 고원지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도자기가 꼰강을 따라 중부지역 고원으로 운반되어 거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파인들이 자주 거래했던 또 하나의 품목은 노예이다. 그들은 전쟁 포로나 산간지역 사람들, 해적 등을 잡아다 일꾼으로 여러 상선에 팔았다. 참파인은 여러 번 남비엣을 공격하여 군사들과 백성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다. 『대월사기전서』에 12세기 참파왕국 사람들이 백성들을 잡아 진랍국(오늘날의 캄보디아)에 노예로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영외대답』에서 주거비는 대부분의 참파 상선이 노예들을 싣고가 팔고 그들의 상선에는 상품을 대신해 노예들을 가득 실었으며 어린 노예 한 명의 가격은 금 3랑 또는 금 3랑에 상당한 향나무라고 말했다.

비자야의 흥망성쇠

참파 왕국의 티나이항에 오는 외국 상선은 주로 중국, 인도, 아랍, 말레이시아, 자바, 진랍, 필리핀, 남비엣이었다.

13-14세기 참파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각 나라와 화친대외정책을 시행하여 왕국의 평안과 번영을 추구했다. 그 중에 해상 경제발전을 중시하여 각국과 무역을 확대하고 주변국들과 우의관계를 유지했다. 중국과는 조공을 바치며 관계를 유지했고, 남비엣과는 대립 속에서도 정략결혼을 통해 평화를 꽤하는 가하면, 필리핀과의 관계는 참파가 10-13세기 필리핀과 무역에서 독점적인 역할을 하여 필리핀과 중국의 모든 상업거래를 참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했다. 이 시기의 참파인의 금 공급원은 필리핀의 부투안(Butuan)이었는데 중국 상인들은 이 사실을 조금도 몰랐다고 한다. 

외국과 무역활동 덕분에 참파 왕국은 주변국가들 보다 번영할 수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며 수도 티나이항을 필두로 하여 여러개의 작은 항구들이 개발되었다. 1318-1324년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 수도원) 수도사 Odoride Bordenone는 상선을 따라 비자야를 방문했고 이렇게 평가했다.

참파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나라가 있는데 매우 아름다운 땅이다. 이곳의 삶은 편리하고 행복하다. 현재 왕(쩨아난왕)은 200여 명의 왕자와 공주가 있고 수 많은 아내와 후궁이 있다. 그는 11,000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는데 신하들이 성안에서 기른다. 여기의 음식은 모두가 만족하는 데 해산물이 풍부하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넘치고 해마다, 계절마다 물고기가 있다.

14세기 말무렵 참파 왕국의 제13대 왕인 쩨봉응아(Chế Bồng Nga)는 남비엣에 빼앗긴 참파 왕국의 옛땅을 되찾기 위해 군사력을 길러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였다. 1361-1390년 기간 동안 15번 이상이나 남비엣을 공격했다. 남비엣과의 계속되는 전쟁으로 비자야의 경제는 점점 쇠퇴하였고 티나이 무역항도 영향을 받아 무역 활동이 점점 약화되어 차츰 아랍, 인도와 중국시장을 연결하는 중계항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티나이항과 함께 꼰강 유역의 시장과 항구들도 영향을 받아 상업활동이 약화되었다. 

 

남비엣, 참파왕국의 비자야를 정복하다

참파 왕국과 남비엣의 대립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승패가 나기 시작했다.

1471년 남비엣의 대규모 원정군이 참파 왕국의 수도인 비자야를 점령하고 베트남의 영토로 복속시켰다. 도시명도 비자야에서 호아이년(Hoài Nhơn)으로 변경하였다. 참파 왕국은 비자야를 포기하고 제3의 도시인 판두랑가(오늘날의 판랑 Phan Rang, 참파왕국 최후의 수도)와 카우타라(오늘날의 냐짱 Nha Trang)로 물러났다.

남비엣의 후 레 왕조의 5대 황제인 레 타인 똥(Lê Thánh Tông)시대에 베트남인이 호아이년으로 대규모 이주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이주한 베트남인은 기존의 참파인들과 공존하며 함께이곳을 건설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옛 항구와 시장의 일부는 계속 사용되었고 그 중에 꼰강 유역의 느억만 항구 지역이 주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응우옌 호앙 군주의 꾸이년(歸仁) 무역항 재건과 발전

16세기 중엽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 군주는 베트남 중남부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옛 참파왕국시기의 중심무역항이었던 티나이 무역항과 느억만 항을 재건하여 발전시켰다. 또한 재능있고 자애로운 인재들이 모여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시명을 호아이년에서 꾸이년(歸仁 귀인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변경한다. 오늘날 꾸이년이란 도시명의 유래이다.  

17세기 초 느억만 무역항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때 주로 거래되던 상품들은 백단향, 기남, 고급목재, 밀납, 코뿔소뿔, 상아, 벌꿀, 사인, 계피 등이었다.

꼰강 지류를 따라 많은 상품 집결지와 시장이 빈딘성 서쪽 산간지역의 민족들과 연결되었고 철저하게 개발되었다. 내륙 지역에 사는 부족민들이 생산한 희귀한 임·토산물은 꼰강 지류에 촘촘히 만들어진 일종의 물류창고에 모아져서 최종적으로 느억만 무역항으로 옮겨졌다.

17-18세기에 느억만 무역항이 발전함에 따라 오늘날의 꾸이년시는 매우 발전했다. 다양한 상품들이 선박이나 우마차를 통해 운송되었다. 레 꾸이 돈의 『무변잡록』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있다. 

 

꾸이년 땅은 예로부터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쌀로 유명했고 백단향과 기남 역시 그 수가 많기로 유명하며 제2급으로 평가받았다. 꾸이년부(俯)의 떤꽌(Tân Quan), 터이푸(Thời Phú), 느억응옷(Nước Ngọt), 느억만(Nước Mặn) 등 모든 곳에서 많은 제비집이 난다. 응우옌 군주는 청주대(淸州隊)를 조직하여 제비집을 채취하러 보냈다.교통수단에 대해서 꾸이년부(俯)의 선단은 93척으로 당쫑 땅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꾸이년 땅에서는 산이나 동굴에서 말이 태어나고 말 떼 마다 수백, 수천의 망아지가 있으며 어떤 말은 키가 2.5척이나 되는 것도 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말을 길들여 상품을 싣고 푸옌으로 오고 여성들도 시장에 가거나 먼 길을 갈때 주로 말을 타고 다닌다.

꾸이년의 많은 마을이 방직과 돗자리 짜기, 철기농기구 생산지로 유명했다. 15-16세기에 베트남 북부 지역 사람들이 당쫑으로 내려왔고 그 중에 꾸이년 땅에 정착하여 사업을 일군 사람들도 있었다. 프엉자인(Phương Danh), 안트엉(An Thường), 푸퐁(Phú Phong)의 비단제품은 그때부터 전국으로 유명해 졌고 상인들에게 선호되어 다량으로 팔렸다. 

무역항, 포구와 하구 인근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농사를 지으며 동시에 상품을 싣는 화물선과 어선을 소유하며 수산물을 개발하고 상업활동에도 종사하여 매우 부유했다. 내륙지역에 거주하는 작은 상인들은 산간지역에서 상품을 모아 느억만 무역항에 집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베트남인과 참파인이외에도 중국, 이탈리아, 포르투갈, 필리핀, 말레이시아, 자바, 샴 등 여러 나라의 상인들도 이와 같은 무역 활동에 참여했다. 

 

1610년, 중국인은 고보이(Gò Bồi) 지역에 와서 살며 상업 거리를 세워 느억만 항구가 나날이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17세기 후반, 많은 명나라 중국인이 청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남비엣으로 이주했는데 그 수가 점점 많아졌다. 이중국인들의 일부는 느억만 인근에서 사업을 일구는 것을 지방정부에 간청하여 느억만 주변에 중국인 거주지를 세웠으며 중국인이 200가구나 될 때도 있었다. 그들은 땅을 사서 상점과 여인숙, 창고를 지어 객주거리를 조성하였다. 그들은 상인들과 항해자들의 신인 관제묘 사당과 천후성모 사당을 세워 긴 항해 동안 평안을 기원했다.

 

느억만에서 오래 거주한 중국인 상인들 외에 다른 외국상인들은 단기간만 머물며 상품이 다 팔리면 필요한 물품을 사서 다른 항구로 떠났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샴 등 많은 동남아시아 상선도 느억만 지역과 빈번한 무역관계를 유지했다. 

서양상선과의 교역

포르투갈 사람들은 16세기부터 꾸이년을 찾아왔다.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군주가 대포에 매우 관심이 있어 많은 서양상선은 이 무기를 응우옌 군주에 팔았다. 1615년, 포르투갈인 Jen de Croix은 응우옌 호앙 군주를 도와 후에(Huế)시에 대포 생산시설을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후에시의 프엉 득(Phường Đúc)이다. 포르투갈인은 응우옌 호앙 군주의 환심을 샀고 그들은 당쫑 지역의 항구에서 매우 순조롭게 거래했다. 1621년 Cristophoro Borri가 느억만에 와서 살며 선교활동을 할 때 이곳의 번영에 대해 썼다. 

우리는 코끼리의 등에 올라 수행원을 따라 느억만으로 갔다. 이 지역은 길이가 약 3.2km이며 넓이는 약 2.4km에 이른다.

177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Charles Chapman이 꾸이년에 와서 항구에 2척의 포르투갈 상선이 정박하여 무역거래하였다. 17세기 초반에 일본 선박이 당쫑의 응우옌 호앙 군주와 자주 교역하였다. 일본의 주인선은 다낭, 호이안, 타인하에서 집중적으로 상업활동을 하였는데 그때 느억만항에 와서 물자를 가져갔다.

빈딘성을 중심으로한 떠이선 왕조의 건국과 대외교류

후 레 왕조가 왕권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며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 지게 된다. 이에 1771년 빈딘성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는데 바로 떠이선 농민항쟁이다. 고통받던 농민들의 적극적 호응과 참여로 베트남 중남부지역으로 세력을 넓힌다. 

농민항쟁을 이끌었던 응우옌 가문의 삼형제 중 막내인 응우옌 냑(Nguyễn Nhạc)이 1778년 떠이선 왕조를 수립하고 옛 참파 왕국의 수도였던 비자야성에 황제성을 세운다.  

177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Charles Chapman이 식수를 구하기 위해 우연히 꾸이년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꾸이년의 지리적 위치와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장점을 한눈에 알아보고, 황제성의 꽝쭝 황제(응우옌 냑)을 알현하여 영국과의 우호통상관계를 제안하고 이에 황제는 흥쾌히 허락하였다. 

그는 꾸이년에 최대한 빨리 상점을 개설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에 긴급요청했으나 그후 떠이선왕조와 응우옌 왕조 간의 전쟁이 발발하여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8세기 무렵 프랑스 상인 Pierre Poivre는 꾸이년을 방문한 후 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꾸이년성에는 느억만이라고 부르는 무역항이 있는데 좋고 안전하며 많은 상인들이 들어올 수 있지만 파이포(호이안)에 비해서는 떨어지고 수도에서 너무 멀어 불편하다. 선장들은 반드시 수도에 여러 번 가야 하는데 그곳까지는 6일이나 걸린다.

느억만 시장거리는 일정한 상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품목은 금, 은, 장신구, 중국약재, 비단, 장례용품, 폭죽, 도자기, 공예품, 책 등이며 이 가게들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느억만 시장은 장이 서는 날 제일 붐볐다. 그때 배들이 항구에 정박하고 산간지역의 임·토산물을 실은 코끼리와 말들은 주변 마을과 소항구에 넘쳐났으며, 국내 상인들의 상품과 외국상선의 상품, 동양과 서양의 다양하고 모든 종류의 상품이 가게마다 가득 찼다고 한다. 

느억만 지역의 우기에는 꼰강 지류에서 강물이 전 지역으로 범람하는데 그때 배로 이루어지는 교역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으로 베트남에서 선교사 활동을하던 Cristophoro Borri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꾸이년에선 9월, 10월, 11월에 비가 계속 오는데 특히 깨모이(Kẻ Mọi)산 지역에 많이 온다. 비가 오면 전 지역에 강물이 범람하여 바다로 흘러나가고 이렇게 육지와 바다가 하나가 된다. 15일에 한번씩은 비가 3일간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데 이곳 사람들은 모두 범람하여 홍수가 나길 기다린다. 물의 계절이 오면 그들은 매우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서로 얼싸안고 즐거움의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데 이는 이 3일의 홍수기간 동안 누구나 어느 지역으로든 배를 타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시장을 여는데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시장들이 열리고 이때 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1년 중 그 어느 때보다 많다.

느억만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 중국 도자기와 일본의 히젠 도자기, 중국의 금속화 폐와 떠이선, 응우옌 왕조시대 베트남의 화폐가 발견 되었다. 또한 중국인 상인들의 신을 모신 관제묘 사당과 마조 사당의 흔적이 매우 뚜렷하여 이 모든 것은 17-18세기 느억만 무역항이 무역활동에서 최고로 번성했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국제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한 꾸이년항

19세기에 와서 깨트 하구에 바다의 퇴적물이 쌓이면서 배의 진입이 어렵게 된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꾸이년항구를 통해서만 내륙으로 연결될 수 있게 되면서, 느억만과 고보이가 무역항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게 된다. 이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는 꾸이년항으로 옮겨진다.   

19세기 이전에 꾸이년 하구는 쟈(Giã, 찧다, 때리다, 해체하다) 하구로 불렸는데 이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그물을 이용한 어업에만 종사하고 매일 고기잡이 배만 출입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된 꾸이년항은 매우 빠르게 발전한다. 느억만 무역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역상권이 꾸이년항 주변으로 이동하여 새롭게 자리잡아 나간다. 이러한 배경에서 1876년에는 프랑스와 응우옌 왕조가 꾸이년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 베트남에서는 고기를 잡을  고기를 때려잡다’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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